자자

지금까지의 포스트가 켈트의 초기신화시대 입니다.

아일랜드 신화를 정리하는 가장 잘 알려진 방법은 아래와 같은 네 가지 시대로 구분하는 것인데요,


신화 시대 The Mythological Cycle 최초로 에린을 통치한 여섯 종족의 이야기. 침략의 서의 내용이 중심이 되며, 괴물과 마법 등 신화적인 색채가 강합니다.

얼스터 시대 The Ulster Cycle 울라Ulaidh 지방을 중심으로 한 영웅담. 쿠훌린Chuchlain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며,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틴 보 쿨리Tain Bo Cuailnge(쿨리의 소 훔치기 The Cattle Raid of Cooley)"입니다.

페니안 시대 The Fenian Cycle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전설적인 영웅들인 페니안(혹은 휘안나Fianna)들을 소재로 한 영웅담. 페니안의 리더인 핀 막 쿠빌Fionn mac Cumhaill, 그의 아들인 퍼거스Fergus와 오신Ossian, 그리고 그의 심복 키일리Caoilte 등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 내용도 다양합니다.

역사 시대 The Historical Cycle 왕들의 시대The Kings Cycle이라고도 불린다. 아일랜드의 역사적인, 혹은 반(半) 역사적인 왕들의 이야기. 주로 기원 후부터 중세까지의 사건들을 다룹니다.


오검 문자라는 문자가 엄연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아일랜드 인들은 신화를 글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나봅니다. 그래서 신들과 영웅들, 훌륭한 왕들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그 기록 수단은 드루이드였고요. 신화와 역사(고대 아일랜드 인들에게 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었으므로)를 정확히 암기하고 입으로 전수할 수 있는 능력은 드루이드의 기본 요건 중 하나였습니다.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바드(bard), 즉 음유시인과 오바테(ovate), 즉 주술사 겸 의사의 교육 과정을 전부 완수해야 했는데, 바드가 되기 위한 교육에는 철학과 시학, 작문 외에도 수백 가지의 노래와 서사시를 암기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암기 교육은 10여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철저히 행해졌고요.

따라서 5세기 경 기독교의 전파로 드루이드 계층이 사라지자, 신화와 역사 역시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몰락한 바드들이 신화와 역사를 전하는 임무를 불완전하게 물려받았고요. 본래 아일랜드의 바드라 불리는 아일랜드의 음유시인은 오바테와 드루이드와 함께 재인 계층(men of arts)에 속하여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이 시기에는 현대인이 흔히 상상하는 떠돌이 음유시인에 불과한 매우 초라한 존재로 변했습니다. 엄격한 교육 과정을 거쳐 정확한 형태로 전달되던 이야기들은 이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누락되고 덧붙여지고 변형되어, 수많은 버전들이 생겨났습니다.

7세기 경, 아일랜드의 수도사들이 이렇게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문서로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구전되던 이야기들은 정신없이 곁가지를 쳐 정전(定典)을 분간할 수 없게 된 후였죠. 어떤 버전을 택하고 어떤 버전을 버리느냐는 오로지 편집자인 수도사의 자의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 일은 신화를 보존하는 작업인 동시에 신화를 버리는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직업의 특성상, 적지 않은 수도사들이 이곳 저곳에 기독교적인 이야기를 첨가하는 웃지 못할 사태도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의해 남겨진 자료들은아일랜드 켈트 족의 신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거의 유일한 자료이며, 역사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보물이라 할 만한 대작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중 유명한 예로는 켈스의 서The Book of Kells, 침략의 서The Book of Invasions(1), 네 왕의 연대기The Annals of Four Masters, 울스터 연대기The Annals of Ulster 등을 들 수 있다.

1) 침략의 서The Book of Invasions의 원제는 레보르 가발라 에렌Lebor Gabala Errean으로, 직역하면 "에린 정복의 서The Book of the Conquest of Ireland"입니다. 12세기에 쓰여진 이 책은 켈트 신화와 전설은 물론, 아일랜드의 초기 역사와 고고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 자료로 평가받고 있고, 아일랜드를 차례로 점령한 여섯 민족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아일랜드 신화 시대를 연구한 거의 모든 자료들은 이 책에 기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가치가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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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신화 - 피르볼그족

<에린 침략의 서>에 따르면, 피르 볼 족에는 다섯 명의 족장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간Gann, 게난Genann, 루드리Rudraige, 셍간Sengann, 그리고 슬랑가Slanga였으며, 델라Dela의 다섯 아들이었다. 그들의 아내의 이르은 각각 아누스트Anust, 리베르Liber, 크누하Cnucha, 푸아트Fuat, 그리고 에타르Etar였다.


푸아트는 마음이 비뚤어지지 않은 슬랑가의 아내였고, 에타르는 용맹한 간의 아내였으며, 아누스트는 창을 잘 다루는 셍간의 아내였고, 크누하는 순수한 게난의 아내였다. 리베르는 붉은 머리 루드리의 아내였는데, 그는 책략의 달인이었으며, 그의 일족은 마음이 넓고 친절했다.
- <에린 침략의 서> 중 -


피르 볼은 세 부족으로 나뉘었다. 슬랑가의 일족, 간과 셍간의 일족, 게난과 루드리의 일족이 각각 이들이다. 슬랑가의 일족은 갈리인Gailioin이라 불리게 되었고, 간과 셍간은 자신의 일족을 피르 볼이라 이름지었으며, 피르 돔난Fir Domnann은 게난과 루드리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이들 모두를 총칭하여 피르 볼이라 하였다. 널리 알려졌듯이 피르 볼은 그들이 가져온 가죽 가방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갈리인은 그들의 투창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러나 피르 돔난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확실치 않다. "돔난"은 "다누Danu" 여신의 이름과 같은 어원을 가졌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확증된 바는 없다.

이들은 아일랜드를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델라의 다섯 아들들은 각 지역의 왕이 되었다.


로흐Loch의 아들 델라의 아들인 슬랑가의 일족이 그 중 하나로, 그들은 인베르 슬리네Inber Slaine에 배를 대었다. 그들의 수는 모두 천 명이었고, 그들의 영지는 인베르 콜파로Inber Colptha부터 코마르 트린우즈케Comar TrinUisce에 이르렀다. 또 다른 한 부족은 인베르 두블리시에 내린 간과 셍간의 일족이었는데, 그들의 수는 모두 2천이었다. 간은 코마르 트린우즈케로부터 벨라흐 콘리스Belach Conglais에 이르는 지역을, 셍간은 벨라흐 콘리스에서부터 륌네흐Luimneach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렸는데, 이는 무무Mumu(오늘날의 문스터Munster)의 5분의 2 이상이었다. 나머지 한 부족은 게난과 루드리의 일족으로, 그들은 인베르 돔난Inber Domnann에 닻을 내렸고, 그리하여 피르 돔난이라 불리게 되었다. 게난은 후에 메이브Medb와 알릴Ailell이 다스리게 되는 바로 그 땅의 왕이 되었고, 루드리는 후에 코노후르Conchobor의 지배를 받을 땅을 차지하였다. 이들 부족의 숫자는 모두 2천이었다. 이들이 바로 피르 볼, 피르 돔난, 그리고 갈리인 족이다.
- <에린 침략의 서> 중 -


이들은 37년 동안 아일랜드를 다스렸다.

피르 볼의 독특한 점은, 이들 다섯 왕을 통합하여 다스리는 상왕(上王; 영어로는 High King이라고 번역됨), 즉 아르드-리Ard Righ라는 제도가 있었다는 점이다. <에린 침략의 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피르 볼 이전에는 "아일랜드의 왕"이라 불릴 자가 없었다. 그러나 피르 볼의 시대에는 아홉 명의 아르드-리가 아일랜드를 거쳐 갔다.


슬랑가는 한 해를 다스리고 죽었다. 그 다음 왕이 된 루드리는 두 해를 다스리고 브루 브라트루아드Brug Bratruad에서 죽었다. 겐과 게난이 함께 왕위에 올라 그 뒤를 이었고, 그들의 통치는 네 해 동안 계속되었다. 둘은 프레민드Fremaind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뒤를 이은 셍간은 다섯 해를 다스리고 게난의 아들 린딜Rindail의 손에 죽었다. 린딜은 여섯 해를 다스리고, 에바 코프레에서 셍간의 아들 포이니드Fodbgenid에게 살해당했다. 포이니드는 네 해를 다스리고, 모이 뮈르헤네Mag Muirthemne에서 린딜의 아들 요후Eochu의 손에 죽었다. 에르크Erc의 아들 요후는 열 해를 다스렸다. 그의 치세하에 아일랜드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고, 내리는 물이라곤 이슬밖에 없었으나, 흉작이 든 해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또한 모든 그릇됨이 아일랜드로부터 추방되었으니, 그는 아일랜드에 처음으로 죄를 벌하는 정의의 법을 행하였던 것이다. 에르크의 아들 요후는 네메드Nemed의 세 아들들의 손에 죽었다. 아일랜드의 왕들 중 자신의 땅에서 치명상을 입은 자는 그가 최초였다.
- <에린 침략의 서>에서 -


피르 볼이 아일랜드에 발디딘 지 30년만에, 투아하 데 다난Tuatha De Danann이 왔다. 이들은 모이 투라Mag Tuired에서 길고 긴 전투를 벌였다 (모이 투라의 전투는 후에 <투아하 데 다나안> 장에서 더 자세히 다룰 계획임). 마침내 전세는 피르 볼에게 불리해졌고, 그들은 북쪽으로 패주했다. 투아하 데 다난은 그들을 뒤쫓으며 학살했다. 요힐의 해안에서 십만 명의 피르 볼이 죽었다. 요히 왕이 네메드의 세 아들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도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나 투아하 데 다난의 피해 역시 적지 않았다. 그들의 왕 누아다는 한쪽 팔을 잃었다.

피르 볼은 거의 전멸당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몇 안 되는 자들은 투아하 데 다난을 피해 아일랜드를 떠나, 아라Ara, 일레Ile, 라흐라Rachra, 그리고 다른 섬들로 도망쳤다. 그들 중 일부는 후에 또 한 번의 모이 투라 전투에서 포보르Fomor를 돕기도 하였다.


네베드와 포보르의 전쟁 이후, 에린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승자인 포보르가 계속 에린을 다스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대부분의 전승은 정 반대의 근거를 제시한다. 뒤이은 포보르의 치세를 전하고 있는 전승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 뒤에 에린에 도착한 피르 볼 족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 땅을 점령한다. 이러한 증거들로 보아, 피르 볼이 도착할 당시 에린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있거나, 적어도 극소수의 사람들만 살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네베드 족의 저항이 너무 거세었던 나머지, 포보르 족은 승리했지만 더 이상 에린의 지배를 지탱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실제로 포보르의 두 왕 중 한 명은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혹은 포보르 족의 약탈적인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그들의 지배 대상은 땅이 아닌 사람이었으며, 따라서 지배하고 약탈할 피지배 종족이 없는 에린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으므로 그들 역시 떠나 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추측도 증거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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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신화 - 네베드족

파르홀론 족이 멸망한 후, 스타른의 아들인 아노몬의 아들 네메드가 에린으로 왔다. 그는 960명의 사람들을 32척의 배에 나누어 태우고 왔으나, 1년 6개월의 항해 끝에 살아남은 자는 오직 아홉 명, 남자 넷과 여자 넷과 네메드 자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는 빠르게 늘어났고, 곧 네메드 족은 8천에 이르는 숫자가 되었다. 그들은 열 두 평야와 네 호수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하고 최초로 요새(라흐raith)를 세웠다.(1)

그러나 파르홀론 족이 그랬듯, 네베드 족 역시 포보르 족과 싸워야 할 운명이었다. 네베드는 네 번의 전투에서 자신의 일족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 후 전염병으로 인해 네베드 족의 수는 크게 줄었다. 2천 명조차 채 살아남지 못한 네베드 족은 포보르 족을 이길 수 없었고,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포보르 족은 네베드 족을 가혹하게 통치했으며 무거운 세금으로 그들을 괴롭혔다. 결국 붉은 옆구리의 페르우스Fearghus(오늘날에는 퍼거스Fergus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를 필두로 한 세 명의 족장이 네베드 족을 지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토리 섬에 있는 포보르 족의 요새를 공격하여 포보르 족의 왕 코난Conann을 죽였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의 왕 모르크Morc가 반격하여 그들 중 대부분을 죽였고, 간신히 살아 남은 30명의 생존자들은 절망한 채 에린에서 도망쳤다.

혹자는 그들이 영원히 에린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혹자는 후에 그들의 수가 8천으로 늘어났으나, 전염병에 의해 전멸했다고도 한다. 또 혹자는 그들이 후에 피르 볼Fir Bolg(혹은 피르 볼그), 혹은 투아하 데 다난이라는 이름으로 에린으로 돌아왔다고도 한다.

1) 라흐raith라는 말은 본래 전투와 방어에 알맞도록 지어진 왕의 거처, 즉 요새와 왕궁의 절충형 건축물을 뜻한다. 침략의 서에 따르면 네베드는 두 요새를 건축했는데, 그들은 각각 라흐 힘비흐Raith Chimbaith와 라흐 힌디흐Raith Chindeich라고 불렸다. 특히 위 니알린Ui Niallain이라는 곳에 세워진 라흐 힌디흐는 단 하루만에 세워졌는데, 마탄 뮌레마르Matan Munremar의 네 아들인 복, 로복, 뤼네, 그리고 로탄이 그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이들의 힘을 두려워한 네베드는 다음 날이 밝기 전 이들을 죽였다.

다카루베 노부아키는 켈트/북구의 신들 [판타지라이브러리] 에서 이들 네 형제가 포보르 족이었으며, 이들을 살해한 것이 네베드 족과 포보르 족의 불화를 초래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 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아직 다른 곳에서 찾은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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