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시대인 신화 시대는 보통 파르홀론 족으로부터 시작되며 네메드 족Nemedian, 피르 볼그 족Fir Bholg, 투아하 데 다난Tuatha De Danann, 그리고 밀레시안 족Milesian이 차례로 아일랜드에 와 전투를 벌이고 그 땅의 지배자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간혹 파르홀론 족 이전에 케시르Cesair가 이끄는 여인족이 아일랜드에 상륙한 사건을 신화 시대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다지 널리 받아들여지는 학설은 아니다. 케시르의 이야기는 아일랜드나 켈트의 신화라가보다는 기독교적 전설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케시르가 노아의 손녀(혹은 조카)라고 설정되어 있으며, 스토리 자체가 성서의 홍수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1)
케시르의 전설을 무시한다면, 아일랜드의 신화는 세라Sera의 아들 파르홀론Partholon으로부터 시작된다. 파르홀론은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 아내인 달니Dealgnaid와 아들 루리Rury, 동생 스타른Starn,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전사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서쪽의 "죽은 자의 땅The Land of the Dead"으로부터 왔다고 전해진다.(2)
일설에 의하면 그 시대 에린에는 사악한 포보르Fomhor 족(3)이 살고 있어서, 파르홀론은 이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포보르 족이 바다를 건너 침략해 왔으며 파르홀론은 이들을 몰아냈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파르홀론은 에린에 정착한 이후 알바(Alba;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전사했으며, 포보르 족이 침략한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어쨌든 파르홀론 족은 포보르 족과 싸웠으며, 이하 평원의 전투 Cath Maige Utha에서 그들을 격퇴하여 바다 너머 만 섬the Isle of Man으로 내쫓았다.
파르홀론 족의 나라는 네 평야와 일곱 호수를 포함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처음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고, 맥주를 발명해 냈으며, 법(法)을 만들었고, 에린 사람들에게 가축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들은 또한 뛰어난 장인들로, 아름다운 금세공품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들이 정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에린에는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고, 파르홀론 족은 곧 전멸했다.(4)
오직 스타른의 아들 투안Tuan만이 살아남았는데, 그는 그 이후 사슴, 연어, 독수리 등으로 모습을 바꾸어 가며 수천 년을 더 살아 여러 종족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다.(3)
1) 침략의 서는 아일랜드를 정복한 여섯 민족의 첫 번째가 케시르가 이끄는 반 족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케시르의 이야기는 19세기 말부터 켈트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편찬되기 시작한 서구의 서적에는 누락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있더라도 간략한 소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국내에 출판된 다케루베 노부아키의 켈트·북구의 신화에서 가장 상세한 버전을 찾을 수 있었다.
침략의 서에 따르면, 성서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기 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아일랜드로 와 정착했다. 이들은 노아의 아들 비흐의 딸 케시르가 이끄는 무리로, 홍수의 재앙을 예지하고 바다로 도망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신상(神像)을 바다에 띄우고 그 인도에 따라 배를 저어 갔다. 출발한 배는 세 척이었지만, 7년 3개월 동안의 항해 도중 두 척의 배가 좌초되었으며, 나머지 한 척에서도 대부분의 승무원이 죽었다. 마침내 그 배가 서쪽 끝의 섬 에린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것은 50명의 여성과 세 명의 전사 뿐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여성이었기에 그들은 반(Van, 또는 Ban) 족, 즉 여인족이라고 불렸다.
당시 에린에는 동물도 식물도 없었고, 참된 신앙도 없었다. 케시르와 그녀가 이끄는 자들은 에린을 그들의 고향으로 삼고 이곳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다. 그들은 서쪽 끝인 이 섬이라면 대재앙을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40일 후 일어난 홍수는 에린마저도 삼키고 말았다. 살아남은 것은 핀탄 막 보흐라Fintan mac Bochra라는 남자 한 명 뿐이었는데, 그는 파도 속에서 잠자며 수백 년동안 바다를 떠다녔다. 그는 투안처럼 여러 가지 동물로 태어나 여러 종족의 흥망성쇠를 본 끝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에린의 역사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2) 이것은 흥미로운 부분인데, 왜냐하면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아일랜드의 서쪽은 바다 뿐이며 이민족이 건너 올 대륙은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략의 서에서는 파르홀론이 시실리 사람이며 그리스에서부터 아일랜드로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3) 침략의 서는 포보르 족이 홍수로 케시르의 일족이 멸망한 이후 아일랜드에 살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후에 네메드 족과 투아하 데 다나안의 시대에도 등장한다. 한때 그들은 네메드 족과 다나안 족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다나안 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래로 모습을 감춘다.
이처럼 포보르 족은 신화 시대에 꾸준히 등장하는 악역이고, 또 가장 비중 있는 종족이기도 하지만, 침략의 서는 아일랜드를 지배한 여섯 종족에 이들을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포보르 족이 '인간'이이 아닌 괴물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 하다. 이 책은 포보르 족이 추한 외모를 가진 반인반수(伴人半獸)이며, 팔과 다리와 눈은 하나씩 뿐이고, 칼날 같은 이는 세 겹으로 나 있다고 기록한다. 실제로 포보르라는 이름은 "바다 거인"을 뜻한다. 이들은 토리 섬Tory Island에 살았고 그 성질은 잔인하고 포악했다.
그러나 책의 후반부로 가면 이러한 성격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고, 포보르 족은 인간과 다름없는 외모와 사회 구조를 가진 종족처럼 묘사된다. 포보르의 군주 발로르Balor는 왼쪽 눈이 흉안(The Evil Eye)으로 항상 은제(銀製) 안대로 가리고 있었지만 오른쪽 눈은 정상이었으므로 가리지 않았다는 설정으로 보아, 분명히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빛의 신 루Lugh의 어머니가 되는 발로르의 딸 에네Ethne(에흐네, 또는 에흘린Ethlinn)은 아름다웠으며, 에리우Eriu(또는 에리Eri)의 연인으로 브레스Breas의 아버지가 되는 엘라한Elathan(또는 엘라하Elatha) 역시 아름다운 청년으로 묘사되는 등, 인간과 다름없을뿐더러 오히려 여느 인간보다 더 아름다운 포보르 족도 다수 등장한다.
포보르라는 종족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려는 노력도 있어 왔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다. 현재까지 확실히 알려진 것은 이들이 실제로 아일랜드에 정착했던 적은 없으며(항상 에린은 그들에게 식민지였다), 절대로 켈트 족은 아니라는 것 뿐이다.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해적이라는 설도 있지만, 증거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단지 신화의 한 구성 요소일 뿐이며 여타 신화의 괴물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어두운 면을 상징한다는 의견도 있다.
4) 침략의 서는 파르홀론 족이 멸망한 이유를 신(기독교의 신)의 분노에서 찾는다. 이 책에 의하면 파르홀론은 부모를 살해했으며, 간음을 범했고, 그의 죄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 전체의 파멸을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