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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문스크랩] 켈트족의 기도문? 1 2007.06.06
  2. [투아하 데 다난] 1-1. 피르 볼과의 전투 1 2006.08.26
  3. [본문스크랩] 오검문자 3 2006.04.30
  4. 자자 2 2006.04.30
  5. 켈트신화 - 피르볼그족 2 2006.04.30
  6. 켈트신화 - 네베드족 2 2006.04.30
  7. 켈트신화 - 반족, 파르홀론족 5 2006.04.30
  8. 켈트족의 축제 - 루나사 3 2006.04.30
  9. 켈트족의 축제 벨타네(혹은 벨테인) 2 2006.04.30
  10. 켈트족의 축제 - 임볼크 2 2006.04.30

[본문스크랩] 켈트족의 기도문?

당신의 손에 할 일이 있기를


당신 손에 언제나 할 일이 있기를.

당신 지갑에 언제나 한두 개의 동전이 남아 있기를.

당신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해가 비치기를.

이따금 당신의 길에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불행에서는 가난하고

축복에서는 부자가 되기를.

적을 만드는 데는 느리고

친구를 만드는 데는 빠르기를.

이웃은 당신을 존중하고

불행은 당신을 아는 체도 하지 않기를.

당신이 죽은 것을 악마가 알기 30분 전에 이미

당신이 천국에 가 있기를.

앞으로 겪을 가장 슬픈 날이

지금까지 겪은 가장 행복한 날보다 더 나은 날이기를.

그리고 신이 늘 당신 곁에 있기를.


- 켈트 족 기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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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아하 데 다난] 1-1. 피르 볼과의 전투

제 1권투아하 데 다난의 도래
Book OneThe Coming of the Tuatha De Danaan


1. 피르 볼그과의 전투 The Fight with the Firbolg


안개 속에서 바람을 뚫고 그들은 아일랜드로 왔다. 그들은 투아하 데 다난Tuatha de Danaan, 즉 다누 신의 아이들이라 불렸으며, 데의 사람들the Men of Dea이라고도 불렸다.

그들은 북으로부터 왔다. 그들이 살던 곳에는 네 도시가 있어 가르침을 주었는데, 위대한 팔리아스Falias, 빛나는 고리아스Gorias, 그리고 휘니아스Finias와 풍요로운 남쪽의 도시 무리아스Murias가 그 이름이었다. 이 도시들에는 네 명의 현자(賢者)가 살아 젊은이들에게 기술과 지식을 전수했는데, 무리아스에는 세니아스Senias가, 휘니아스에는 금발의 시인 아리아스Arias가, 고리아스에는 고귀한 품성의 우리아스Urias가, 그리고 팔리아스에는 모리아스Morias가 있었다. 그들은 이 네 도시로부터 네 가지 보물을 가져왔는데, 팔리아스로부터는 리아 파일Lia Fail이라고도 불리는 운명의 돌을, 고리아스로부터는 칼을, 휘니아스로부터는 승리의 창을, 그리고 무리아스로부터는 끊임없이 음식이 솟아나는 솥을 가져왔다.

그들의 왕은 누아다Nuada였지만, 리르Lir의 아들 마나난Manannan이 훨씬 더 위대했다. 그들 중 다른 족장들로는왕의 동생이자 글자를 가르쳤던 오마Ogma, 치유를 익혔던 디안케흐트Diancecht, 전투의 신 네이트Neit, 기술의 신 크레데누스Credenus, 그리고 대장장이 고브뉴 등이 있었다. 또한 그들 중 가장 위대한 여인들로는 전쟁의 여신 바이브Badb, 전사(戰死)한 자의 머리로 돛대를 세운 마하Macha, 전쟁의 까마귀 모리유Morrigu, 그리고 후에 아일랜드에 이름을 준 다아다Dagda의 세 딸들, 에이레Eire와 포디아Podia와 반바Banba가 있었다. 시인들을 간호하는 에돈Eadon과 시의 여인 브리이트Brigit도 그들과 함께 했다. 시인들은 브리이트를 숭배했는데, 이는 그녀가 매우 위대하고 고귀한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치유의 여신이기도 했으며, 대장장이의 여신이기도 했고, 어두운 밤 휘파람으로 다른 이를 부르는 법을 처음 생각해 낸 이도 그녀였다. 그녀의 얼굴 반쪽은 추했으나, 다른 반쪽은 매우 아름다웠고, 그녀의 이름은 브레오-시이트Breo-saighit, 즉 불화살을 뜻했다. 그 외에도 투아하 데 다나안의 여인들 중에는 마법사들과 위대한 여왕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신들의 어머니라 불렸던 다나Dana는 그 중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했다.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쟁기와 태양과 개암나무를 중요시했으며, 아일랜드는 이 세 가지, 개암나무 콜Coil과 쟁기 케흐트Cecht와 태양 그리안Grian으로써 나뉘어진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에게는 바다 아래 솟아나는 우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시적 영감과 지식의 열매를 맺게 하는 지혜의 개암나무가 아홉 그루 자랐다. 그들의 잎새와 꽃은 한꺼번에 피어나 한꺼번에 우물 위로 떨어져 내려, 보라빛 파도를 일으켰다. 다섯 마리 송어들이 그 아래서 열매를 먹으려 기다렸다. 열매를 먹은 송어의 몸에는 붉은 반점이 나타나, 그 송어를 먹는 사람은 누구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혜와 시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그 우물로부터는 지혜의 강이 일곱 갈래 솟아나 다시 그리로 흘러들었는데, 마법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 강에서 물을 마신 사람들이었다.

투아하 데 다나안이 온 것은 벨타네의 첫날, 오늘날에는 메이 데이라 불리는 날이었다. 그들은 코나흐트의 북서쪽에 닻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에 앞서 아일랜드에 살던 가방의 민족 피르볼그Firbolgs는 구릉 위로 가로누운 안개 밖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 때 피르볼그의 왕은 에르크Erc의 아들 요히Eochaid였다. 사자(使者)들은 그가 거하는 타비르Teamhair로 와 아일랜드에 새로운 민족이 발을 들였으나, 그들이 땅 속에서 솟아났는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바람 속에서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들은 모이 레인Magh Rein에 정착했다고 고했다.

그들은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리라 생각했으나, 그는 놀라지 않았다. 지난 밤 그는 꿈을 꾸었는데, 드루이드들에게 그 꿈의 의미를 물었을 때, 그들은 그 꿈이 머지않아 강력한 적이 나타나게 될 것을 예언한다고 풀이했기 때문이다.

요히 왕은 고문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들은 뛰어난 전사를 보내어 낯선 자들을 만나 말을 걸게 하라고 입을 모아 주장했다. 그리하여 뛰어난 투사 스렝이 선택되었다. 그는 자신의 적갈색 방패를 들고, 두꺼운 손잡이가 달린 두 개의 창과 칼을 든 채, 말을 타고 타비르를 떠나 낯선 자들이 거하는 모이 레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목적지에 이르기 전, 망을 보던 투아하 데 다나안의 병사들이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하여 투아하 데 다나안은 그들의 전사 브레스에게 칼과 창과 방패를 들려 스렝에게 내보냈다.

그리하여 두 전사는 서로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그들은 서로를 천천히 살펴보고, 서로의 무기에 호기심을 느끼며, 마침내 이야기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곳에서 그들은 멈추어 서, 자신의 몸 앞으로 방패를 내밀고 그것으로 세게 땅을 친 뒤, 그 가장자리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브레스가 먼저 입을 열었고, 스렝은 그가 자신의 언어인 아일랜드 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불안이 가신 그는 좀더 접근했고, 둘은 서로의 가문과 혈통을 물었다.

잠시 후 그들은 방패를 치웠다. 스렝은 브레스가 들고 있는 가늘고 날카로운 창이 두렵다고 말했다. 브레스는 스렝이 들고 있는 두꺼운 창이 두렵다고 말했고, 모든 피르볼그 인들이 그와 같은 창을 쓰느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스렝은 자신의 창을 묶은 매듭을 풀고, 브레스가 그것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자 브레스는 그 창이 비록 끝이 뾰족하지 않지만, 양쪽 옆날이 무척 날카롭고 매우 튼튼하며 무겁다는 것에 놀랐다. 스렝은 그 창의 이름이 크리세흐Craisech이며, 그들은 방패를 뚫고 살과 뼈를 부수어 죽음이나 결코 낫지 않을 상처를 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브레스가 들고 있는 날카롭고 가늘고 끝이 뾰족한 창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헤어질 때, 둘은 각 편의 전사들이 서로의 무기를 알 수 있도록 창을 교환했다. 브레스는 피르볼그에게 그들이 아일랜드의 절반을 단념한다면 자신의 민족은 그 절반에 만족할 것이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터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전쟁이 일어나애 할 것이라는 전갈을 전했다. 그리고 그와 스렝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서로에게 친구로 남을 것을 약속했다.

스렝은 타비르로 돌아가 브레스의 전갈을 전하고 창을 보여 주었다. 그는 동족들에게 자신들보다 훨씬 더 좋은 무기를 가진 민족과 싸워서는 안되며, 나라를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요히와 그가 다스리는 족장들은 서로의 의견을 구한 뒤, 이렇게 결론지었다. "우리는 저 이방인들에게 나라의 절반을 내어 주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절반을 내어 준다면, 그들은 곳 전부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브레스는 투아하 데 다나안에게 돌아가 무거운 창을 보여 주고, 강하고 용맹한 전사로부터 이것을 얻었으며, 그는 매우 강인했고 단단히 무장해 있었노라고 말했다. 투아하 데 다나안은 곧 전쟁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코나흐트의 더 먼 서쪽으로 돌아가, 험준한 벨가타Belgata 산이 뒤를 둘러싼 평원 모이 니아Magh Nia에 자리를 잡고 성벽을 쌓고 도랑을 팠다. 이동하여 벽을 쌓는 동안, 세 여왕, 베이브와 마하와 모리유는 피르볼그가 작전을 짜는 타비르로 갔다. 그들은 마법의 힘으로 안개와 구름을 불러와 그곳을 온통 암흑에 휩싸이게 만들고는, 비와 피의 불을 내리게 하여 사람들이 아무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이 사흘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날, 피르볼그의 세 드루이드, 케사른Cesarn과 나하크Gnathach와 인나하크Ingnathach가 그 마법을 풀었다. 그리고 피르 볼그는 전사들을 그러모아 열 한 개 대대를 구성하여 모이 니아로 진격했다.

투아하 데 다나안의 왕 누아다는 시인들을 보내어, 이 나라의 절반만으로 만족하겠노라고 다시 한 번 제안했다. 요히 왕은 시인들로 하여금 그가 다스리는 족장들에게 묻게 했고, 족장들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시인들은 대신 언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족장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잠시 전쟁을 연기해야 하오. 우리는 창과 갑옷을 정리하고 투구를 빛내고 칼을 갈 시간이 필요하오. 또한 우리는 당신네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창을 만들 시간도 필요하오. 당신들 역시, 우리의 크리세흐와 같은 창을 만들 시간이 필요할 것이오."

그리하여 그들은 1/4 해동안 전쟁을 연기하고 채비를 갖출 것에 동의했다.

하지(夏至)날 그들은 전투를 시작했다. 아홉 명의 세 배의 투아하 데 다나안의 전사들이 아홉 명의 세 배의 피르볼그의 전사들과 맞서 싸웠고, 그들은 모두 죽음을 맞았다. 요히 왕은 사자를 보내어 매일 전투를 치룰 것인지, 이틀에 한 번 전투를 치룰 것인지 물었다. 누아다는 매일 전투를 하되, 각 편에서 같은 수의 전사들이 나와 싸워야 한다고 대답했다. 요히는 동의했지만,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피르볼그의 전사들이 투아하 데 다나안의 전사들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전투는 나흘동안 계속되었다. 양편은 모두 훌륭한 무훈(武勳)을 세웠고, 많은 전사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저녁까지 살아 있는 전사들은 각 편의 의사들의 치료를 받았다. 그들은 부상자들을 모든 종류의 약초가 담긴 약탕(藥湯)으로 목욕시켰는데, 그렇게 하면 전사들은 순식간에 건강과 힘을 되찾아 다음 날의 전투에 출전할 수 있었다.

나흘째 되는 날 전운은 투아하 데 다나안에게 기울었고, 피르볼그는 후퇴했다. 요히 왕은 전투 중 극심한 갈증을 느끼고 마실 것을 찾기 위해 전장을 떠났다. 오십 명의 세 배가 되는 전사들이 그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오십 명의 세 배가 되는 투아하 데 다나안의 전사들이 그들을 쫓아, 트리흐 요힐레Traigh Eothaile라 불리는 해안까지 이르렀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마침내 요히 왕은 죽어 쓰러졌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곳에 왕을 묻고 거대한 돌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열한 개 대대의 피르볼그 중 오직 삼백 명만이 남았을 때,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스렝이었다. 누아다는 그들에게 평화를 제안하며 아일랜드의 다섯 지방 중 마음에 드는 한 곳을 주겠노라고 했다. 스렝은 그 제안을 수락하고 코나흐트를 갖겠노라고 했다. 그 후 그와 그가 다스리는 사람들은 그곳에 살았으며, 그들의 아이들이 그 뒤를 이었다. 훼르디아드Ferdiad는 그들의 후손이었는데, 그는 후에 쿠훌린Cuchulain을 상대로 훌륭히 싸웠다. 쿠훌린을 죽게 한 카브레Cairbre의 아들 에르크Erc도 그들의 후손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최초로 벌어진 투아하 데 다나안의 전투는 후에 모이 티라Magh Tuireadh [M게임덕분에 모이투라라고 알려져있죠]의 전투라 불리게 되었다.

투아하 데 다나안은 타비르Teamhair를 점령했다. 이곳은 드륌 칸(Druim Cain; 아름다운 산봉우리)이라 불리기도 했고, 리아드륌(Liathdruim; 잿빛 산봉우리)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드륌 나 데스칸(Druim na Descan; 내다보는 산봉우리)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당시 타비르는 다른 어떤 곳보다 중요한 장소였는데, 이는 그곳에 거하는 왕이 바로 온 아일랜드를 다스리는 상왕(上王; the High King)이었기 때문이다. 왕궁은 북쪽을 향해 지어져 있었고, 인질의 언덕the Hill of the Hostages은 옥좌의 북동쪽에 드러누워 있었으며, 그 서쪽으로는 타비르의 녹색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타비르의 북서쪽, 넴나흐Nemnach라고도 불리는 시이의 언덕the Hill of the Sidhe에서는 니흐Nith 강이 흘러나왔는데, 바로 그 강에 아일랜드 최초의 물방앗간이 지어졌다.

인질의 언덕 북쪽으로는 바위가 하나 있었다. 리아 파일Lia Fail이라 불리는 이 바위는, 장차 아일랜드를 다스리게 될 왕이 그것을 밟을 때마다 큰 굉음(轟音)을 내곤 했다. 세 속삭임의 벽the Wall of the Three Whispers 가까이에는 여인들의 집the House of the Women이 있었는데, 그 집에는 동쪽으로 난 일곱 개의 문과 서쪽으로 난 일곱 개의 문이 있었다. 타비르의 축제는 종종 이곳에서 열리곤 했다. 또한 그곳에는 천 명의 전사들이 거하는 대저택이 있어, 그 남쪽에 위치한 여전사들의 언덕the Hill of the Woman Soldiers과 마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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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지금까지의 포스트가 켈트의 초기신화시대 입니다.

아일랜드 신화를 정리하는 가장 잘 알려진 방법은 아래와 같은 네 가지 시대로 구분하는 것인데요,


신화 시대 The Mythological Cycle 최초로 에린을 통치한 여섯 종족의 이야기. 침략의 서의 내용이 중심이 되며, 괴물과 마법 등 신화적인 색채가 강합니다.

얼스터 시대 The Ulster Cycle 울라Ulaidh 지방을 중심으로 한 영웅담. 쿠훌린Chuchlain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며,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틴 보 쿨리Tain Bo Cuailnge(쿨리의 소 훔치기 The Cattle Raid of Cooley)"입니다.

페니안 시대 The Fenian Cycle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전설적인 영웅들인 페니안(혹은 휘안나Fianna)들을 소재로 한 영웅담. 페니안의 리더인 핀 막 쿠빌Fionn mac Cumhaill, 그의 아들인 퍼거스Fergus와 오신Ossian, 그리고 그의 심복 키일리Caoilte 등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 내용도 다양합니다.

역사 시대 The Historical Cycle 왕들의 시대The Kings Cycle이라고도 불린다. 아일랜드의 역사적인, 혹은 반(半) 역사적인 왕들의 이야기. 주로 기원 후부터 중세까지의 사건들을 다룹니다.


오검 문자라는 문자가 엄연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아일랜드 인들은 신화를 글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나봅니다. 그래서 신들과 영웅들, 훌륭한 왕들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그 기록 수단은 드루이드였고요. 신화와 역사(고대 아일랜드 인들에게 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었으므로)를 정확히 암기하고 입으로 전수할 수 있는 능력은 드루이드의 기본 요건 중 하나였습니다.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바드(bard), 즉 음유시인과 오바테(ovate), 즉 주술사 겸 의사의 교육 과정을 전부 완수해야 했는데, 바드가 되기 위한 교육에는 철학과 시학, 작문 외에도 수백 가지의 노래와 서사시를 암기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암기 교육은 10여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철저히 행해졌고요.

따라서 5세기 경 기독교의 전파로 드루이드 계층이 사라지자, 신화와 역사 역시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몰락한 바드들이 신화와 역사를 전하는 임무를 불완전하게 물려받았고요. 본래 아일랜드의 바드라 불리는 아일랜드의 음유시인은 오바테와 드루이드와 함께 재인 계층(men of arts)에 속하여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이 시기에는 현대인이 흔히 상상하는 떠돌이 음유시인에 불과한 매우 초라한 존재로 변했습니다. 엄격한 교육 과정을 거쳐 정확한 형태로 전달되던 이야기들은 이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누락되고 덧붙여지고 변형되어, 수많은 버전들이 생겨났습니다.

7세기 경, 아일랜드의 수도사들이 이렇게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문서로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구전되던 이야기들은 정신없이 곁가지를 쳐 정전(定典)을 분간할 수 없게 된 후였죠. 어떤 버전을 택하고 어떤 버전을 버리느냐는 오로지 편집자인 수도사의 자의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 일은 신화를 보존하는 작업인 동시에 신화를 버리는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직업의 특성상, 적지 않은 수도사들이 이곳 저곳에 기독교적인 이야기를 첨가하는 웃지 못할 사태도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의해 남겨진 자료들은아일랜드 켈트 족의 신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거의 유일한 자료이며, 역사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보물이라 할 만한 대작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중 유명한 예로는 켈스의 서The Book of Kells, 침략의 서The Book of Invasions(1), 네 왕의 연대기The Annals of Four Masters, 울스터 연대기The Annals of Ulster 등을 들 수 있다.

1) 침략의 서The Book of Invasions의 원제는 레보르 가발라 에렌Lebor Gabala Errean으로, 직역하면 "에린 정복의 서The Book of the Conquest of Ireland"입니다. 12세기에 쓰여진 이 책은 켈트 신화와 전설은 물론, 아일랜드의 초기 역사와 고고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 자료로 평가받고 있고, 아일랜드를 차례로 점령한 여섯 민족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아일랜드 신화 시대를 연구한 거의 모든 자료들은 이 책에 기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가치가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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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신화 - 피르볼그족

<에린 침략의 서>에 따르면, 피르 볼 족에는 다섯 명의 족장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간Gann, 게난Genann, 루드리Rudraige, 셍간Sengann, 그리고 슬랑가Slanga였으며, 델라Dela의 다섯 아들이었다. 그들의 아내의 이르은 각각 아누스트Anust, 리베르Liber, 크누하Cnucha, 푸아트Fuat, 그리고 에타르Etar였다.


푸아트는 마음이 비뚤어지지 않은 슬랑가의 아내였고, 에타르는 용맹한 간의 아내였으며, 아누스트는 창을 잘 다루는 셍간의 아내였고, 크누하는 순수한 게난의 아내였다. 리베르는 붉은 머리 루드리의 아내였는데, 그는 책략의 달인이었으며, 그의 일족은 마음이 넓고 친절했다.
- <에린 침략의 서> 중 -


피르 볼은 세 부족으로 나뉘었다. 슬랑가의 일족, 간과 셍간의 일족, 게난과 루드리의 일족이 각각 이들이다. 슬랑가의 일족은 갈리인Gailioin이라 불리게 되었고, 간과 셍간은 자신의 일족을 피르 볼이라 이름지었으며, 피르 돔난Fir Domnann은 게난과 루드리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이들 모두를 총칭하여 피르 볼이라 하였다. 널리 알려졌듯이 피르 볼은 그들이 가져온 가죽 가방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갈리인은 그들의 투창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러나 피르 돔난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확실치 않다. "돔난"은 "다누Danu" 여신의 이름과 같은 어원을 가졌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확증된 바는 없다.

이들은 아일랜드를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델라의 다섯 아들들은 각 지역의 왕이 되었다.


로흐Loch의 아들 델라의 아들인 슬랑가의 일족이 그 중 하나로, 그들은 인베르 슬리네Inber Slaine에 배를 대었다. 그들의 수는 모두 천 명이었고, 그들의 영지는 인베르 콜파로Inber Colptha부터 코마르 트린우즈케Comar TrinUisce에 이르렀다. 또 다른 한 부족은 인베르 두블리시에 내린 간과 셍간의 일족이었는데, 그들의 수는 모두 2천이었다. 간은 코마르 트린우즈케로부터 벨라흐 콘리스Belach Conglais에 이르는 지역을, 셍간은 벨라흐 콘리스에서부터 륌네흐Luimneach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렸는데, 이는 무무Mumu(오늘날의 문스터Munster)의 5분의 2 이상이었다. 나머지 한 부족은 게난과 루드리의 일족으로, 그들은 인베르 돔난Inber Domnann에 닻을 내렸고, 그리하여 피르 돔난이라 불리게 되었다. 게난은 후에 메이브Medb와 알릴Ailell이 다스리게 되는 바로 그 땅의 왕이 되었고, 루드리는 후에 코노후르Conchobor의 지배를 받을 땅을 차지하였다. 이들 부족의 숫자는 모두 2천이었다. 이들이 바로 피르 볼, 피르 돔난, 그리고 갈리인 족이다.
- <에린 침략의 서> 중 -


이들은 37년 동안 아일랜드를 다스렸다.

피르 볼의 독특한 점은, 이들 다섯 왕을 통합하여 다스리는 상왕(上王; 영어로는 High King이라고 번역됨), 즉 아르드-리Ard Righ라는 제도가 있었다는 점이다. <에린 침략의 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피르 볼 이전에는 "아일랜드의 왕"이라 불릴 자가 없었다. 그러나 피르 볼의 시대에는 아홉 명의 아르드-리가 아일랜드를 거쳐 갔다.


슬랑가는 한 해를 다스리고 죽었다. 그 다음 왕이 된 루드리는 두 해를 다스리고 브루 브라트루아드Brug Bratruad에서 죽었다. 겐과 게난이 함께 왕위에 올라 그 뒤를 이었고, 그들의 통치는 네 해 동안 계속되었다. 둘은 프레민드Fremaind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뒤를 이은 셍간은 다섯 해를 다스리고 게난의 아들 린딜Rindail의 손에 죽었다. 린딜은 여섯 해를 다스리고, 에바 코프레에서 셍간의 아들 포이니드Fodbgenid에게 살해당했다. 포이니드는 네 해를 다스리고, 모이 뮈르헤네Mag Muirthemne에서 린딜의 아들 요후Eochu의 손에 죽었다. 에르크Erc의 아들 요후는 열 해를 다스렸다. 그의 치세하에 아일랜드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고, 내리는 물이라곤 이슬밖에 없었으나, 흉작이 든 해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또한 모든 그릇됨이 아일랜드로부터 추방되었으니, 그는 아일랜드에 처음으로 죄를 벌하는 정의의 법을 행하였던 것이다. 에르크의 아들 요후는 네메드Nemed의 세 아들들의 손에 죽었다. 아일랜드의 왕들 중 자신의 땅에서 치명상을 입은 자는 그가 최초였다.
- <에린 침략의 서>에서 -


피르 볼이 아일랜드에 발디딘 지 30년만에, 투아하 데 다난Tuatha De Danann이 왔다. 이들은 모이 투라Mag Tuired에서 길고 긴 전투를 벌였다 (모이 투라의 전투는 후에 <투아하 데 다나안> 장에서 더 자세히 다룰 계획임). 마침내 전세는 피르 볼에게 불리해졌고, 그들은 북쪽으로 패주했다. 투아하 데 다난은 그들을 뒤쫓으며 학살했다. 요힐의 해안에서 십만 명의 피르 볼이 죽었다. 요히 왕이 네메드의 세 아들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도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나 투아하 데 다난의 피해 역시 적지 않았다. 그들의 왕 누아다는 한쪽 팔을 잃었다.

피르 볼은 거의 전멸당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몇 안 되는 자들은 투아하 데 다난을 피해 아일랜드를 떠나, 아라Ara, 일레Ile, 라흐라Rachra, 그리고 다른 섬들로 도망쳤다. 그들 중 일부는 후에 또 한 번의 모이 투라 전투에서 포보르Fomor를 돕기도 하였다.


네베드와 포보르의 전쟁 이후, 에린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승자인 포보르가 계속 에린을 다스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대부분의 전승은 정 반대의 근거를 제시한다. 뒤이은 포보르의 치세를 전하고 있는 전승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 뒤에 에린에 도착한 피르 볼 족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 땅을 점령한다. 이러한 증거들로 보아, 피르 볼이 도착할 당시 에린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있거나, 적어도 극소수의 사람들만 살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네베드 족의 저항이 너무 거세었던 나머지, 포보르 족은 승리했지만 더 이상 에린의 지배를 지탱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실제로 포보르의 두 왕 중 한 명은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혹은 포보르 족의 약탈적인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그들의 지배 대상은 땅이 아닌 사람이었으며, 따라서 지배하고 약탈할 피지배 종족이 없는 에린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으므로 그들 역시 떠나 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추측도 증거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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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신화 - 네베드족

파르홀론 족이 멸망한 후, 스타른의 아들인 아노몬의 아들 네메드가 에린으로 왔다. 그는 960명의 사람들을 32척의 배에 나누어 태우고 왔으나, 1년 6개월의 항해 끝에 살아남은 자는 오직 아홉 명, 남자 넷과 여자 넷과 네메드 자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는 빠르게 늘어났고, 곧 네메드 족은 8천에 이르는 숫자가 되었다. 그들은 열 두 평야와 네 호수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하고 최초로 요새(라흐raith)를 세웠다.(1)

그러나 파르홀론 족이 그랬듯, 네베드 족 역시 포보르 족과 싸워야 할 운명이었다. 네베드는 네 번의 전투에서 자신의 일족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 후 전염병으로 인해 네베드 족의 수는 크게 줄었다. 2천 명조차 채 살아남지 못한 네베드 족은 포보르 족을 이길 수 없었고,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포보르 족은 네베드 족을 가혹하게 통치했으며 무거운 세금으로 그들을 괴롭혔다. 결국 붉은 옆구리의 페르우스Fearghus(오늘날에는 퍼거스Fergus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를 필두로 한 세 명의 족장이 네베드 족을 지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토리 섬에 있는 포보르 족의 요새를 공격하여 포보르 족의 왕 코난Conann을 죽였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의 왕 모르크Morc가 반격하여 그들 중 대부분을 죽였고, 간신히 살아 남은 30명의 생존자들은 절망한 채 에린에서 도망쳤다.

혹자는 그들이 영원히 에린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혹자는 후에 그들의 수가 8천으로 늘어났으나, 전염병에 의해 전멸했다고도 한다. 또 혹자는 그들이 후에 피르 볼Fir Bolg(혹은 피르 볼그), 혹은 투아하 데 다난이라는 이름으로 에린으로 돌아왔다고도 한다.

1) 라흐raith라는 말은 본래 전투와 방어에 알맞도록 지어진 왕의 거처, 즉 요새와 왕궁의 절충형 건축물을 뜻한다. 침략의 서에 따르면 네베드는 두 요새를 건축했는데, 그들은 각각 라흐 힘비흐Raith Chimbaith와 라흐 힌디흐Raith Chindeich라고 불렸다. 특히 위 니알린Ui Niallain이라는 곳에 세워진 라흐 힌디흐는 단 하루만에 세워졌는데, 마탄 뮌레마르Matan Munremar의 네 아들인 복, 로복, 뤼네, 그리고 로탄이 그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이들의 힘을 두려워한 네베드는 다음 날이 밝기 전 이들을 죽였다.

다카루베 노부아키는 켈트/북구의 신들 [판타지라이브러리] 에서 이들 네 형제가 포보르 족이었으며, 이들을 살해한 것이 네베드 족과 포보르 족의 불화를 초래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 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아직 다른 곳에서 찾은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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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신화 - 반족, 파르홀론족

최초의 시대인 신화 시대는 보통 파르홀론 족으로부터 시작되며 네메드 족Nemedian, 피르 볼그 족Fir Bholg, 투아하 데 다난Tuatha De Danann, 그리고 밀레시안 족Milesian이 차례로 아일랜드에 와 전투를 벌이고 그 땅의 지배자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간혹 파르홀론 족 이전에 케시르Cesair가 이끄는 여인족이 아일랜드에 상륙한 사건을 신화 시대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다지 널리 받아들여지는 학설은 아니다. 케시르의 이야기는 아일랜드나 켈트의 신화라가보다는 기독교적 전설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케시르가 노아의 손녀(혹은 조카)라고 설정되어 있으며, 스토리 자체가 성서의 홍수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1)

케시르의 전설을 무시한다면, 아일랜드의 신화는 세라Sera의 아들 파르홀론Partholon으로부터 시작된다. 파르홀론은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 아내인 달니Dealgnaid와 아들 루리Rury, 동생 스타른Starn,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전사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서쪽의 "죽은 자의 땅The Land of the Dead"으로부터 왔다고 전해진다.(2)

일설에 의하면 그 시대 에린에는 사악한 포보르Fomhor 족(3)이 살고 있어서, 파르홀론은 이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포보르 족이 바다를 건너 침략해 왔으며 파르홀론은 이들을 몰아냈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파르홀론은 에린에 정착한 이후 알바(Alba;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전사했으며, 포보르 족이 침략한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어쨌든 파르홀론 족은 포보르 족과 싸웠으며, 이하 평원의 전투 Cath Maige Utha에서 그들을 격퇴하여 바다 너머 만 섬the Isle of Man으로 내쫓았다.

파르홀론 족의 나라는 네 평야와 일곱 호수를 포함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처음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고, 맥주를 발명해 냈으며, 법(法)을 만들었고, 에린 사람들에게 가축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들은 또한 뛰어난 장인들로, 아름다운 금세공품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들이 정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에린에는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고, 파르홀론 족은 곧 전멸했다.(4)

오직 스타른의 아들 투안Tuan만이 살아남았는데, 그는 그 이후 사슴, 연어, 독수리 등으로 모습을 바꾸어 가며 수천 년을 더 살아 여러 종족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다.(3)

1) 침략의 서는 아일랜드를 정복한 여섯 민족의 첫 번째가 케시르가 이끄는 반 족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케시르의 이야기는 19세기 말부터 켈트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편찬되기 시작한 서구의 서적에는 누락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있더라도 간략한 소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국내에 출판된 다케루베 노부아키의 켈트·북구의 신화에서 가장 상세한 버전을 찾을 수 있었다.

침략의 서에 따르면, 성서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기 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아일랜드로 와 정착했다. 이들은 노아의 아들 비흐의 딸 케시르가 이끄는 무리로, 홍수의 재앙을 예지하고 바다로 도망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신상(神像)을 바다에 띄우고 그 인도에 따라 배를 저어 갔다. 출발한 배는 세 척이었지만, 7년 3개월 동안의 항해 도중 두 척의 배가 좌초되었으며, 나머지 한 척에서도 대부분의 승무원이 죽었다. 마침내 그 배가 서쪽 끝의 섬 에린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것은 50명의 여성과 세 명의 전사 뿐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여성이었기에 그들은 반(Van, 또는 Ban) 족, 즉 여인족이라고 불렸다.

당시 에린에는 동물도 식물도 없었고, 참된 신앙도 없었다. 케시르와 그녀가 이끄는 자들은 에린을 그들의 고향으로 삼고 이곳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다. 그들은 서쪽 끝인 이 섬이라면 대재앙을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40일 후 일어난 홍수는 에린마저도 삼키고 말았다. 살아남은 것은 핀탄 막 보흐라Fintan mac Bochra라는 남자 한 명 뿐이었는데, 그는 파도 속에서 잠자며 수백 년동안 바다를 떠다녔다. 그는 투안처럼 여러 가지 동물로 태어나 여러 종족의 흥망성쇠를 본 끝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에린의 역사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2) 이것은 흥미로운 부분인데, 왜냐하면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아일랜드의 서쪽은 바다 뿐이며 이민족이 건너 올 대륙은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략의 서에서는 파르홀론이 시실리 사람이며 그리스에서부터 아일랜드로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3) 침략의 서는 포보르 족이 홍수로 케시르의 일족이 멸망한 이후 아일랜드에 살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후에 네메드 족과 투아하 데 다나안의 시대에도 등장한다. 한때 그들은 네메드 족과 다나안 족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다나안 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래로 모습을 감춘다.

이처럼 포보르 족은 신화 시대에 꾸준히 등장하는 악역이고, 또 가장 비중 있는 종족이기도 하지만, 침략의 서는 아일랜드를 지배한 여섯 종족에 이들을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포보르 족이 '인간'이이 아닌 괴물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 하다. 이 책은 포보르 족이 추한 외모를 가진 반인반수(伴人半獸)이며, 팔과 다리와 눈은 하나씩 뿐이고, 칼날 같은 이는 세 겹으로 나 있다고 기록한다. 실제로 포보르라는 이름은 "바다 거인"을 뜻한다. 이들은 토리 섬Tory Island에 살았고 그 성질은 잔인하고 포악했다.

그러나 책의 후반부로 가면 이러한 성격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고, 포보르 족은 인간과 다름없는 외모와 사회 구조를 가진 종족처럼 묘사된다. 포보르의 군주 발로르Balor는 왼쪽 눈이 흉안(The Evil Eye)으로 항상 은제(銀製) 안대로 가리고 있었지만 오른쪽 눈은 정상이었으므로 가리지 않았다는 설정으로 보아, 분명히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빛의 신 루Lugh의 어머니가 되는 발로르의 딸 에네Ethne(에흐네, 또는 에흘린Ethlinn)은 아름다웠으며, 에리우Eriu(또는 에리Eri)의 연인으로 브레스Breas의 아버지가 되는 엘라한Elathan(또는 엘라하Elatha) 역시 아름다운 청년으로 묘사되는 등, 인간과 다름없을뿐더러 오히려 여느 인간보다 더 아름다운 포보르 족도 다수 등장한다.

포보르라는 종족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려는 노력도 있어 왔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다. 현재까지 확실히 알려진 것은 이들이 실제로 아일랜드에 정착했던 적은 없으며(항상 에린은 그들에게 식민지였다), 절대로 켈트 족은 아니라는 것 뿐이다.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해적이라는 설도 있지만, 증거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단지 신화의 한 구성 요소일 뿐이며 여타 신화의 괴물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어두운 면을 상징한다는 의견도 있다.


4) 침략의 서는 파르홀론 족이 멸망한 이유를 신(기독교의 신)의 분노에서 찾는다. 이 책에 의하면 파르홀론은 부모를 살해했으며, 간음을 범했고, 그의 죄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 전체의 파멸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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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족의 축제 - 루나사

루나사는 세 가지 가을 축제 중 가장 먼저 시작되는 축제였다. 이 날은 수확의 계절을 알리는 날이었으며, 여름이 쇠하고 겨울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날이기도 했다.

루나사는 라마스(Lammas)라고도 불렸는데, 이것은 "빵의 축제(the Feast of Bread)"를 뜻하는 색슨 어의 라-마스(Hlaf-mass)에서 온 말이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루나사의 축제와 의식은 풍작을 기원하고 수확의 때가 온 것을 축하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특히 풍작을 기원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는데, 그 해 가을 얼마나 거둬들이는지에 따라 부족의 사활(死活)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빌베리(bilberries)를 따 모음으로써 루나사 의식이 성공한 것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빌베리가 많다면, 의식은 성공한 것이고 그 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루나사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일랜드의 루(Lugh) 신을 찬양하는 축제였다. 일다나흐(Idanach), 즉 "모든 일에 능한 신(the God of All Skills)"이라고도 불리는 루는 "밝게 빛나는 자(Bright or Shining One)"라고 알려져 있다. 태양의 신인 그는 농업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이기도 했다. 브리튼과 웨일즈에서 루는 "류(Lleu)"라고 불렸는데, 별과 재생(再生)의 여신인 아리안로드(Arianrhod)의 아들이었다. 보통 이 날에는 루를 찬양하기 위한 운동 경기들이 벌어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희생제(犧牲祭)를 행하기도 했다. 이것은 루를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기도 했지만, 어떤 곳에서는 나무를 심을 땅을 마련하다 죽은 루의 양어머니 탈티우(Tailtiu)를 위한 의식으로서 행해졌다. 많은 종류의 곡식과 약초, 열매 등이 이 시기에 수확되어 건조되었다.

켈트족의 축제 벨타네(혹은 벨테인)

4월 30일 경 행해진 벨타네는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축제였고, 세계의 재생과 되찾은 풍요를 축하하는 의식이었다. 벨타네는 알반 에일레르와 임볼릭에 이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봄의 축제였고, 또한 켈트족의 축제 중 두 번째로 중요한 축제였다. 벨타네는 사빈과 짝을 이루어 1년을 겨울과 여름으로 2등분했다.

고대 켈트 사회에서 벨타네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사빈의 반대"라는 뜻의, 케트사빈(Cetsamhain)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지역에 따라 구분하자면, 아일랜드에서는 벨타네(Beltaine 또는 Beltane)라 불린 반면 스코틀랜드에서는 베일툰(Bealtunn)이라고 했으며, 웨일즈와 만 섬(the Isle of Man)에서는 쉔 도 보울딘(Shenn do Boaldyn)이라 불렸다. 후에 이 축제는 색슨 족에게 계승되어 왈푸르기스나흐트(Walpurgisnacht)라고 불리워졌는데, 이것은 "왈푸르가(Walpurga)의 날"이라는 뜻이었다. 왈푸르가는 색슨 족이 섬기던 5월의 여신이었다. 아일랜드에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브리이드 여신이 성 브리지트로 변신했듯이, 이 여신도 후에 성 왈푸르가가 되었다.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 벨타네는 메이 이브(May Eve)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벨타네"라는 이름은 본래 "빛나는 불(bright fire)" 혹은 "활활 타오르는 불(brilliant fire)"을 의미했다. 이 불은 드루이드의 장(長)이 켈트 족 이전의 민족이 믿었던 신을 위해 피웠던 모닥불을 뜻했다. 그 신은 벨(Bel), 벨리(Beli), 발라르(Balar), 발로르(Balor), 벨레누스(Belenus) 등등의 이름으로 불렸는데, 게일 족 신화의 세르눈노스(Cernunnos)와 동일한 신이라는 설도 있지만 더욱 유력한 것은 아일랜드 신화에서 빛의 신 루(Lugh)의 할아버지이자 천적으로 등장하는 바로 그 "흉안의 발로르(Balor the Evil Eye)"라는 설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패배한 수메르 족의 신이 승리한 아카드 족의 신화에서 안타고니스트로 등장했듯이, 피정복자의 신이었던 발로르는 정복자 켈트 족의 신 루에 의해 처단되는 악신(惡神)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전승에 따르면, 벨타네는 "뿔이 난 남신(the Horned One)"이 죽어 여신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날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살아난 남신은 여신의 배우자가 되어 그녀를 임신시키고, 다음 해의 벨타네에 다시 여신의 몸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다른 전승은 벨타네가 포로로 잡혀 있던 여름의 신이 풀려나는 날이라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젊은 여신인 여름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그녀의 아버지인 대지의 거인으로부터 달아나는 날이라는 말도 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켈트 어로 '후아헤(Huathe)'라 불리는 산사나무(hawthorn)는 아버지인 거인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는 이 나무가 메이폴(Maypole) 축제 때 쓰인다.

벨타네는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즐거운 축제였다. 벨타네 아침 이슬로 목욕을 하면, 그 해 내내 점점 더 아름다워진다는 믿음도 있었다. 벨타네 이브*, 즉 벨타네 저녁에 켈트 인들은 거대한 모닥불을 두 개 피웠다. 그 불을 피우는 데에는 여름의 영광을 찬미하는 아홉 가지 성스러운 나무가 쓰였다.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면, 그들은 그 두 불길 사이로 가축떼를 몰고 지나갔다. 이것은 다음 해동안 가축들이 건강하게 보호받기를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또한 두 모닥불에는 생명과 풍요가 대지로 돌아오는 것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었다. 시골에서는 흥겨운 파티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메이폴 주위를 돌며 춤추거나 불길을 뛰어넘고, 꽃을 따는 등의 행사가 있었다. 그 중 많은 것들은 메이폴 축제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또한 이 날 밤에는 젊은 연인들이 함께 숲으로 가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오는 풍습이 있었다.

생명이 소생하고 대지와 그녀의 모든 아이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벨타네는 고대 켈트 인들에게 무척 관능적인 시간으로 생각되었다. 이 날은 부족 전체가 여름의 선명한 빛깔과 숨막히는 향기를 즐기는 날이었고, 길고 지루한 겨울이 끝난 환희에 자신을 내맡기는 날이었다. 전통적으로 이 날은 약혼과 결혼의 날이기도 했다.

이 날 사람들은 산사나무 가지를 꺾어 문앞을 장식했다. 화이트손(Whitethorn)이라고도 불리는 산사나무는 희망과 기쁨, 그리고 보호를 상징하는 나무였다. 산사나무 가지를 꺾거나 집으로 가져오는 것은 무척 엄한 금기(禁忌)였지만, 벨타네 날만은 예외였다.

또 벨타네 모닥불 위를 뛰어넘는 풍습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젊은 사람들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되고,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을 마치게 되며, 임산부(姙産婦)들은 순산하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아일랜드 신화에 따르면, 투아하 데 다나안(Tuatha De Danann)과 밀레시안 족(the Milesians)이 아일랜드에 온 날도 벨타네 즈음이었다고 한다.


*주 : 벨타네 이브(벨타네 전날 저녁이라는 뜻)과 벨타네 저녁이라는 말이 같은 뜻으로 쓰였는데, 이것은 사실 오늘날의 시간 계산으로는 벨타네 전날 저녁이라는 뜻이다. 오늘날과는 달리, 고대 켈트 인들은 해가 지는 것을 한 날이 지나간 것으로 파악했다. 즉, 하루는 해가 저무는 저녁에 끝나고, 해진 뒤의 밤부터는 다음 날이었던 것이다.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는 것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시간 계산으로는 '벨타네 전날 저녁', 즉 '벨타네 이브'가 되는 시간이 이들의 관점에서는 '벨타네 저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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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족의 축제 - 임볼크

본래는 "우유 속"이라는 뜻의 임볼크는 양과 암소의 수유기(授乳期)를 나타내는 시간이었다.

양은 새끼를 배기 전에는 젖을 낼 수 없는데, 바로 이 때가 양이 새끼를 배는 시기였다. 우유는 부족의 생존에 매우 중요한 양식이었으므로, 이 시기는 매우 즐겁고도 중요한 때였다. 양이 젖을 낸다는 것은 기나 긴 겨울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곧 녹색 벌판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것을 뜻했다.

임볼크 제의(祭儀)에서는 우유나 크림을 땅에 붓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것은 인간과 짐승을 길러 준 대지에 감사를 표하고, 대지에 풍요와 자비가 되돌아오기를 비는, 즉 봄이 오기를 비는 의식이었다.

임볼크는 브리드(Brid), 혹은 브리지트(Brigit)라고도 알려진 브리이드(Brighid) 여신을 위한 축제였다. 브리이드는 다아다(Dagda)의 딸이었고, 봄을 상징하는 여신이었다. 임볼크는 그녀가 태양의 씨앗을 배고 배가 부른 시기라고 믿어졌다. 브리이드가 새로운 생명을 낳을 시기가 가까워져 옴에 따라, 대지 속의 씨앗도 싹을 틀 준비를 하고, 세계는 새로운 생명의 약속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시기, 그래서 임볼크는 깨어남의 시간이자 약속의 시간이며, 희망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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