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켈트족에 대하여

"「갈리아」적(的) 또는 「갈라티아」적(갈리아와 갈라티아는 모두 켈트족이 세운 나라임 ― 이재환)이라는 나라들(즉 켈트인이 세운 나라들 ― 이재환)은 모두 전쟁에 미쳐 있고, 어떤 면에서는 단순하고 거친 반면에 전쟁터에 나서면 매우 용감하고 민첩했다."

― 서기 1세기경, 로마 시민권을 지녔던 그리스인 역사학자 스트라보가 그의 책『지리학』에 쓴 말(스트라보는 자기가 설명한 켈트족의 모습은 "켈트가 로마의 지배에서 독립해 있던 시대의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갈리아인(人)들은 단순하며 활기에 넘칠 뿐 아니라, 어리석게 뽐내는 성격과 스스로를 아름답게 꾸미는 열정을 품었다."

― 위와 같음

"갈리아인은 키가 컸고, 스스로를 높이 추켜세웠다."

― 로마 시민권을 지닌 그리스인 학자 아리아노스(서기 96년 ∼ 서기 180년경)의 책『알렉산드루스(:영어 이름은 알렉산더. 알렉산드루스는 고대 그리스식 발음이다 ― 이재환) 대왕의 원정』(줄여서 『원정』)에서. 그는『원정』을 쓸 때 그리스의 철학자인 에픽테토스의 글(:서기 60년경에 쓰여짐)을 참고했다. 위에 나오는 기록은 알렉산드루스가 살아 있었을 때인 서기전 335년, 알렉산드루스의 진영에 사신으로 온 켈트족을 묘사한 것이다 - 이재환)

"암시와 예시로 이어지는 켈트인의 화술(話術. 말하는 기법)은 간단하고 좀처럼 알아듣기 힘들며,(이 점은 논리성과 어법, 문법을 철저히 따지며 보다 직설적인 그리스·로마의 화술과 다르다 ― 이재환) 그들 스스로를 부풀리고 다른 이를 납작하게 누르려고 과장하는 일도 잦았다. 그들은 위협적이고 자신만만하면서 극적인 태도를 지녔지만, 예민했으며 (모든 것을 - 이재환) 보다 빨리 배우고 이해했다."

― 서기전 50년경 디오도로스 시켈로스가 쓴 책『역사 총서』에서

"전쟁터에서 무모하기까지 한 개인적 용맹, 집에서 손님에게 보이는 친절함과 엄격한 예절규범은 ― 유럽 시골의 보다 역사적인 후계자들[: 아일랜드 인, 스코틀랜드 인, 웨일즈인, 브로따뉴인, 에스파냐의 서쪽 끝에 살고 있는 갈리시아인, 스위스의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레또족 ― 이재환]보다 더 우월하지는 못하지만, 그와 비길 만한(:그러니까 엇비슷한 - 이재환) ― 켈트인의 세대주의적 모습을 보여준다.(:시대가 바뀌어도 계속 이어지는 켈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 이재환)

… 밝은 빛깔, 꾸미개[:장식]와 칭찬과 놀이, 잔치와 싸움을 즐기는 성질은 상황이 허락하자 하나같이 유럽의 '사소한 결점'이 되었고,(켈트인이 유럽을 정복하면서 이런 성격이 널리 퍼졌다는 뜻이다 - 이재환), 유럽의 온유한 지역에 사는 소박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자연스러운 성질로 여겨졌다."

― T.E.G 포웰의 책『켈트인』에서

"켈트인들은 형식을 사랑했으며, 웅변술은 끝없는 찬양의 대상이었다.(형식을 좋아한다는 점은 옛날 우리나라 사람과 비슷하고, 끊임없이 떠드는 웅변술을 좋아한다는 점은 중남미인이나 아랍인과 비슷합니다 ― 이재환)

서기전 2세기에 갈리아 부근을 여행한 그리스의 저술가 루키아노스는 매력적이며 상징적인 한 장면을 적어 남겼다. 사자가죽을 걸친 한 노인이 힘없이 웃으면서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그의 혀와 사람들의 귀는 금과 호박(琥珀. 보석의 일종 - 이재환)으로 만든 가는 사슬로 이어져 있었다. 그들은 그를 칭송하고, 춤을 추며 열심히 그의 뒤를 따랐다. 루키아노스에 따르면 그 노인은 오그미오스(드루이드 오검의 메아리음音)로 웅변술을 대표했다.

동물적인 힘보다 훨씬 센 웅변술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발달하기 때문에 헤라클레스의 사자가죽('힘'을 상징한다. 웅변술이 '힘이 세다.'는 사실을 나타내려고 뒤집어쓴 것이다 ― 이재환)을 걸치고 있었다."

― 존 샤키의 책인『켈트의 신비 ; 고대 종교』에서

"전사 중의 전사(가장 뛰어난 전사 - 이재환)가 되는 일은 켈트인에게 '이상적인 삶'이었다. 싸우다가 동무(친구)들과 시인들, 그리고 죽은 적 100명에 둘러싸여 죽는 것은 가장 훌륭한 죽음이었다. 전사가 될 때부터 최고의 순간을 준비하는 자세가 켈트 전사들에게 용맹과 긍지를 심어주었다."

― 위와 같음

"그들은 우정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

― 서기전 140년경에 쓰여진 폴리비우스의 책『역사』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만 한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하루만 살아도 좋다."

― 에이레(아일랜드의 켈트식 이름)의 영웅 서사시인 쿠 쿨린의 이야기에서 주인공 쿠 쿨린이 한 말. 현대 저술가인 프로인시아스 맥카나는 이 말이 "켈트의 영웅정신"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이야기라고 말한다.

맥카나는 "한 사람의 명예에 대한 매우 민감한 관심이 삶과 개인의 지위를 지배했던(다시말해서 어떤 사람이 남들에게 용감하다거나 명예롭다는 평가를 얻어야 높은 지위를 얻고 편하게 살 수 있었으며 존경받을 수 있었던 ― 이재환) 그런 사회에서는 동료들에게 존경받는 일이 중요했다."고 덧붙인다.(만약 동료들에게 '겁쟁이'나 '불명예스러운 짓을 저지른 자'라고 낙인찍히면 자신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 이재환)

"모든 갈라티에(켈트인), 트리발리(트라키아. 트라키아 인은 오늘날의 불가리아에 살던 인도 ― 유럽 계통의 기마민족임 ―이재환)와 다른 여러 미개인('미개인'이라는 말은 순전히 그리스·로마의 시각이니 이 점을 참고하고 읽기 바람 : 이재환)은 영혼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위험을 받아들였다."

― 서기 300년경 이암블리코스가 쓴 책『피타고라스의 생애』에서

쭈욱 나열해 놓은 것은 그리스로마 학자들의 켈트족에 대한 인식입니다.

문명세계라고 생각하는 로마인들 눈에 켈트인들은 미개인으로 보이죠?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고요]

이런 껍데기 말고, 켈트족의 알맹이를한번 볼까요?

켈트족은 청동기 시대에 독일 남동부에 살던 집단입니다.

이사람들이 차츰차츰 이동하기 시작해서,

나중엔갈리아지방, 브리타니아지방에 있게됩니다. [프랑스, 영국인거 아시죠?]

아무래도 신화에 대한 것이니세계사시간에 나올만한 이런 이야기들은 자제하도록 하죠.

켈트인의 잘 알려지지 못한점들중 하나가 바로 '자주 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고대의 켈트 인들은 향수로 악취를 숨겨야 했던 중세인들보다 훨씬 청결했습니다.

['향수'가 중세시대 몸에서 나는 악취를 숨기기위해 발명된거는 다들 아시리리 믿습니다.]


기후가 습하고 물이 흔한 지역에 살던 켈트 인들에게 몸을 씻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로마의 역사가들은 누구나 켈트 족이 "목욕"을 좋아하며, 머리칼과 손톱 등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에 관심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켈트 족의 귀족들은 누구나 매일 저녁 "비누"로 목욕을 하고, 머리를 매만진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들은 목욕만큼이나 세탁도 자주 했는데, 켈트 족의 법률인
"브레혼 법"은 양부모가 아이를 데려다 키울 경우 그 아이에게

"최소한 두 벌의 망토를 주어, 이틀에 한 번씩 빨아 번갈아 입도록 할 것"

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켈트 족은 전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있어서 외양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꾼다는 것은 결코 쓸데없거나 사치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머리칼, 잘 가꾼 손톱,
훌륭한 옷차림 등은 (설사 전사라 할지라도) 칭찬할 만한 것이었죠.
반면 수준 이하로 가꾸지 않은 외양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부유하고 신분 높은 사람일수록 그에 알맞은 옷차림이 요구되었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걸수도 있죠?.

왕족과 귀족들, 신분 높은 전사들은 화려하게 수놓아진 형형색색의 옷들을 입고 갖가지
귀금속으로 치장했으며, 평민 역시 법과 재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다양하고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기를 즐겼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현재 아일랜드의 리넨이 유명한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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